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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대의 속마음까지 읽고 공감할 때 진정한 대화 가능

기사입력 : 2020-04-08 1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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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19 팬데믹(세계적 대유행)이 확산되면서 사회적 거리두기가 하나의 문화로 자리잡아가고 있다. 그러나 사회적 거리두기는 물리적으로 거리를 두는 것을 의미할 뿐 사회적으로 담을 쌓고 고립된 생활을 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사진=로이터
1950년대 후반에 서울에는 특수 초등학교가 두 곳이 있었다. 이 학교들은 일반 초등학교에 입학하기 전에 입학시험을 치르고 소수의 합격자만 다닐 수 있는 명문학교였다. 필자도 여섯 살의 어린 나이에 이 중 한 학교에 입학시험을 보았지만, 결과는 안타깝게도 불합격이었다. 결국 한 해 재수(再修) 끝에 합격하여 자부심을 가지고 즐겁게 학교생활을 했다.

당시에는 지역적으로 소위 공부를 잘하는 학생들이 다닌다는 명문중학교들이 있었다. 제법 공부를 잘했던 필자에게 여러 선생님이 제일 공부를 잘하는 학생들이 다니는 명문중학교에 무난히 합격할 것이라고 칭찬해주시곤 하셨다. 하지만 5학년 2학기에 그 당시에는 난치병으로 분류되는 특수한 질병을 얻게 되었다. 덕분에 입시 준비에 제일 중요한 1년을 거의 요양을 하면서 보냈다. 6학년 2학기가 되어서야 증세가 조금 호전되었고 다시 공부를 시작했지만, 시간이 턱없이 부족했고 명문중학교에 갈 성적이 나오지 않았다.

결국 자존심이 상했지만 다니고 싶었던 학교보다 몇 등급 아래의 학교에 지원했다. 하지만 그 학교마저 불합격하고 말았다. 초등학교도 재수를 한 터라 할 수 없이 전기에 불합격한 학생들이 가는 후기 중학교에 입학했다. 이미 두 번의 입시에서 불합격한 필자의 마음에는 큰 상처가 났고 열등감과 분노가 자리 잡았다. 초등학교 때 친했던 친구들과는 연락을 끊었다. 그들은 모두 자신이 원한 학교에 진학했기 때문에 편한 마음으로 그들을 만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동시에 중학교에서도 친구를 사귀지 못했다. 필자가 그들보다 더 월등하지만 단지 재수가 없는 바람에 그 학교에 다니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결국 중학교 3년을 외톨이로 지내면서 열등감과 분노로 공부를 안 하고 반항적인 학교생활을 했다. 그 당시에는 고등학교 때 또 입학시험이 있었다. 열심히 공부하면 원하는 고등학교에 진학할 수 있다는 교사들의 충고와 조언은 잔뜩 삐뚤어진 마음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다시 공부는 등한시하고 무위도식하면서 3학년이 되었다.

​1950년대 서울 특수초교 두곳 존재
소수 합격자만 다닐 수 있는 명문교

텅 빈 교실에서 혼자 소설책을 읽고 있던 어느 날 복도를 지나가시던 교감선생님이 교실로 들어오셨다. "공부 안 하고 소설책이나 보고 있느냐?"고 야단치시거나, 아니면 "열심히 공부하면 원하는 고등학교에 갈 수 있다"고 상투적인 조언을 해 주실 것으로 예상하고 있는 필자에게 다가오시더니 뜻밖에 "성열아"하고 부드러운 음성으로 이름을 불러주시면서 "아직도 마음이 그렇게 아프니?"하시면서 포근하게 안아주셨다. 그때 갑자기 걷잡을 수 없는 통곡이 마음속 깊은 곳에서부터 쏟아져 나왔다. 너무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나도 놀랐지만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북받쳐 오르는 설움에 교감선생님의 품에 안겨서 엉엉 소리를 내며 울었다. 지금껏 많은 사람들이 충고나 조언을 해주었지만, 그 당시 필자가 얼마나 절망하고 있는지 그 마음을 알아주는 사람은 없었다. 그런데 교감선생님은 꾸중을 하시거나 훈계를 하시는 것이 아니라 조용히 안아주시면서 그동안 얼마나 마음이 아팠는지 어루만져주셨다.

실컷 울고 난 후 울음이 잦아들자 교감선생님이 조용히 그러나 또렷하게 말씀하셨다. "성열아, 분단된 조국 산하를 바라보면서 슬픈 민족의 아들임을 잊지 말아라." 그때 나는 그 말씀이 무슨 뜻인지도 정확히 모른 채 "예"하고 대답했다. 중학교 들어와서 처음으로 다른 사람이 나에게 해주는 조언을 저항 없이 온전히 받아들였다. 교감선생님이 나가신 후 혼자 멍하니 서있다가 문득 '내가 이렇게 허송세월하면서 지내면 안 되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면서 내가 무언가 중요한 사명을 가지고 있는 사람인 것처럼 느껴졌다. 그 후 내 학교생활은 변했다. 그리고 열심히 공부했다.

명문중 불합격에 몇등급 아래 지원
불합격 필자 마음에 열등 분노 자리

별로 자랑스럽지 못한 필자의 과거를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소개하는 이유는 진정한 대화란 어떤 것인지를 설명하기 위해서다. 한창 절망과 분노로 반항적인 생활을 하는 필자에게 많은 선생님이 훌륭한 조언을 해주셨다. 하지만 그 분들의 말씀은 하나도 마음을 움직이지 못했다. 오히려 옳은 말을 들으면 들을수록 더욱더 반항적이 되고 마음은 오히려 더 닫히기만 했다. 그런데 교감 선생님의 말씀은 그 의미가 뭔지도 정확히 모르지만 마음속으로 깊이 들어와 지금까지의 생활을 확 바꾸어 놓았다.

그 차이는 무엇일까? 지난번에도 설명했듯이, 그 차이는 대화와 독백에서 찾을 수 있다. 조금 거칠게 이야기하면, 대부분의 교사는 필자에게 좋은 조언을 해주었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사실은 독백을 한 것이다. 다시 말하면, 상대방의 이야기를 듣지 않았다. 이와 대조적으로 교감 선생님은 필자와 대화를 하셨다. 자기의 말을 하기 전에 먼저 상대, 즉 필자의 마음의 소리를 들으시고 거기에 답을 하신 것이다.

필자가 원하는 중학교에 진학하지 못하고 두 번이나 입시에 실패했던 좌절감과 분노를 단지 불성실한 학교생활을 하는 것을 통해 간접적으로 드러내고 있다는 것을 알아주신 것이다. 한국의 불자(佛子)들이 좋아하는 '관음보살(觀音菩薩)'은 자비로 중생의 괴로움을 구제하고 왕생의 길로 인도하는 귀한 일을 하신다. 중생의 괴로움을 구제하기 위해서는 제일 먼저 그 괴로움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한다. 그리기 위해서는 먼저 무엇 때문에 괴로운지 그 원인을 들어야하고, 또 어떻게 도와줄 수 있는지를 들어야한다. 즉 말을 들어야 한다(聽音). 하지만 관음보살은 소리를 듣는 것뿐만이 아니라, 소리를 보기까지 한다(觀音). 대화를 잘 하는 사람들은 상대의 말속에서 암암리에 표현되는 감정을 알아서 공감(共感)해 준다. 그리고 정말 대화를 잘 하는 사람은 상대가 미처 하지 못한 속마음까지 '본다(觀)'. 우리말에도 "속마음을 읽어준다"라는 표현이 있다. '읽기' 위해서는 먼저 보아야 한다. 보지 않고는 읽을 수 없다.

공부 외면하고 무위도식 3학년 보내
걷잡을 수 없는 통곡 마음에서 분출

우리는 상대의 소리를 듣지 않고, 즉 청음도 하지 못하고 자신의 말만 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하지만 이렇게 말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의아해하며 자신은 상대방의 말을 잘 들어준다고 항변(抗辯)하며 섭섭해 한다. 물론 많은 사람들이 상대의 이야기를 경청하고 자신의 의사를 표현한다. 그것은 상대의 말을 듣는다는 의미가 무엇인지 오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진정으로 상대의 말을 잘 듣는다는 것은 말의 내용에 관심을 가지는 것이 아니라 내용의 기저에 숨어있는 마음을 읽어준다는 것이다.

대화의 예를 들어 설명해보자. 최근에 필자는 중요한 강의를 앞두고 택시를 이용했다. 택시기사에게 고려대학교에 가달라고 말하면서 얼마나 걸리는지 물었다. 30분쯤 걸릴 거라고 대답했다. 10분쯤 지난 후 필자가 '여기서는 얼마나 걸리느냐?'고 다시 물었다. 이때 기사가 하는 반응을 가정해보자.

⓵ 별 대답 없이 운전만 한다.

⓶ "20분쯤 걸릴 거예요."

⓷ "시간에 늦을까봐 걱정되시나 봐요."

⓸ "중요한 약속이 있어서 초조하신가 봐요. 잘 되시기 바래요."

이 대답들 중 ⓶는 내용에만 반응한 것이다. ⓷은 내용뿐만 아니라 필자의 마음까지 받아준 것이다. ⓸는 필자의 속마음까지 읽어준 것이다. ⓶는 형식적으로는 대화이다. 그리고 일상생활에서 우리가 대화라고 하는 것은 대개 이 수준에서 이루어진다. 하지만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대화는 ⓷번과 ⓸이다. 특히 ⓸처럼 상대가 반응해주면 중요한 약속을 앞두고 초조해하는 자신의 '존재' 자체가 인정받은 것 같은 안도감까지 느끼게 된다.

'사회적 거리두기'는 물리적으로 거리를 두는 것을 의미한다. 사회적으로 담을 쌓고 살거나 고립된 생활을 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물리적으로는 거리를 두고 있지만 심리적으로는 얼마든지 더 가깝게 될 수 있다. 다양한 의사소통 매체를 통해 서로 상대의 마음을 먼저 헤아리는 참된 대화의 자세와 방법을 이용하면 코로나19는 예상하지 못했던 결과를 낳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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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성열 고려대 교수

필자 한성열 고려대 심리학과 교수는 국내 긍정심리학계의 최고 권위자로 미국 심리학을 중심으로 하는 기존 심리학이 문화의 영향력을 경시하는 것을 비판하고 인간 행동에 미치는 문화의 중요성을 설파하고 있다. 특히 한 교수는 심리학 전공자가 이론보다는 많은 사람들을 만나 소통해야 한다는 생각에서 기업체, 대학, 교회 등을 찾아다니며 몸 건강 못지않게 마음의 건강이 중요함을 역설하고 있다. 저서로는 ‘신명의 심리학’이 있으며 역서로는 ‘성공적 삶의 심리학’ ‘노년기의 의미와 즐거움’ ‘남자 나이 마흔이 된다는 것’ 등이 있다.


노정용 글로벌이코노믹 기자 noja@g-e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