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5.14 (금)

신체적 폭력으로 마음까지 입은 깊은 상처 '내면 치유' 병행해야

기사입력 : 2021-02-24 09: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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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폭력은 더 이상 철없던 시절의 행위가 아니라 시간이 지나서도 언젠가는 처벌을 받는 범죄다. 피해자가 느끼는 모멸감이나 피해 경험은 훨씬 오래간다. 자료=글로벌이코노믹
우리는 매일 다양한 희노애락(喜怒哀樂)의 감정을 경험하며 살고 있다. 이 경험 중 대부분은 잊힌다. 하지만 몇몇 강렬했던 경험은 평생 잊지 못하거나 마음 깊은 곳에 억압되어 잊혀진 것처럼 살고 있다. 하지만 이 억압된 경험은 비록 오랜 시간이 지난 후라도 처음 경험했을 때와 동일한 인물이나 환경을 마주하면 그때의 감정이 다시 떠오른다. 동일인은 말할 것도 없고 비슷한 사람이나 환경을 만나기만 해도 옛 경험이 떠오르며 격한 감정에 휩싸이기도 한다. 특히 즐거운 경험보다는 억울하고 슬프고 당황스러웠던 기억이 더 오래 남는다.

최근 인기 여자 프로 배구선수의 글에서 촉발된 '학교폭력(학폭)' 관련 폭로가 남자 배구를 넘어 야구 등 스포츠계와 연예계까지 확산되고 있다. 이제 학폭은 이제는 철없던 시절의 행위가 아니라 시간이 지나서도 언젠가는 처벌을 받는 범죄로 여겨지게 되었다.

학교폭력 폭로 스포츠·연예계로 확산

폭력은 "신체적인 공격행위 등, 불법한 방법으로 행사되는 물리적 강제력"이다. '학폭' 뿐만 아니라 가정폭력, 성폭력 등 모든 종류의 폭력에는 몇 가지 공통점이 있다. 첫째는 가해자는 자신의 행위 때문에 피해자가 받았을 심리적 고통과 상처에 대해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번 학폭 폭로도 가해자 자신이 피해를 받았다고 느꼈을 때의 분노를 SNS에 표현하면서 시작되었다. 가해자는 인스타그램에 "나잇살 좀 쳐먹은 게 뭔 벼슬도 아니고 좀 어리다고 막 대하면 돼? 안 돼"라는 등의 글을 올렸고, 트위터에는 "괴롭히는 사람은 재미있을지 몰라도 괴롭힘을 당하는 사람은 죽고 싶다"는 글을 남겼다. 이 글이 결국 그동안 피해자로 억울한 삶을 살면서도 분노를 억제하고 참아왔던 피해자를 격분시켰고, 자신이 이 선수에게 중학교 시절에 얼마나 심한 괴롭힘과 모멸(侮蔑)을 당했는지를 폭로하기에 이르렀다. 만약 이 가해선수가 과거 자신의 행동으로 피해자가 얼마나 모멸감을 느끼고 '죽고 싶었을지를' 조금이라도 공감했다면 감히 이런 글을 남길 수가 없었을 것이다.

가해자나 일반인들이 이해하기 어려운 현상 중의 하나는 피해의 경험이 얼마나 오래 지속되는지에 관한 것이다. 너무 두렵거나 당황스러운 경험에 무방비로 노출되거나 직접 피해를 보면 그 순간 우리의 몸은 "얼어붙는다", 즉 경직된다. 하지만 얼어붙는 것은 몸만이 아니다. 마음도 동시에 얼어붙는다. 그리고 얼어붙은 몸과 마음은 마음속 깊은 곳에 저장되어 '한'으로 남아있다. 한자 '한(恨)'은 마음을 뜻하는 '忄(심)'과 거스르다, 멈추다를 뜻하는 '艮(간)'으로 구성되어 있다. 즉 한은 '마음을 거스리는 감정이 멈추어있는 것'을 뜻한다. 평소에는 '얼어붙은 상태로 멈추어있던 감정(한)'이 적합한 자극, 즉 동일한 인물이나 유사한 상황에 마주치면 활성화되면서 다시 그때의 감정으로 돌아간다. 다시 과거의 감정으로 돌아가는 이유는 "빨리 한을 풀고 즐거운 마음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소망이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피해경험은 적절한 도움을 받고 극복되지 않으면 언제 터질지 모르는 휴화산의 상태로 계속 마음속에 남아있다.

즐거운 경험보다 억울한 일 오래 기억

45세의 K씨가 집단상담에서 자신이 겪고 있는 어려움을 호소하였다. K씨의 주된 호소는 자신보다 나이가 많은 남자 앞에만 가면 주눅이 들고 '얼어붙어' 자신의 의견을 정확하게 전달하지 못하는 것이었다. 며칠 전에도 상관이 자신이 작성한 서류에 대해 얼토당토않은 비판을 하는데도 자신의 의견을 정확히 전달하지 못하고 진땀만 흘리다 나왔다. 설명을 하려고 해도 몸이 얼어붙어 말도 잘 안 나오고 더듬기까지 했다. 문제는 이런 일이 이번만이 아니라는 것이다. 거의 유사한 사건이 자신보다 나이가 많은 남자 앞에만 가면 반복적으로 일어났다. 그래서 중년이 된 지금에도 사회생활에서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더욱 당황스러운 것은 그 원인을 모른다는 것이었다.

집단상담의 공감적 환경 속에서 자신의 과거를 되짚어가던 K씨는 초등학교 5학년 때 사건을 회상하기 시작했다. 초등학교 5학년 때 반장이 갖고 있던 학급비가 도난당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그 때 담임선생님이 느닷없이 K씨를 앞으로 부르더니 "도둑놈"이라고 욕을 하면서 뺨을 세게 때리기 시작했다. 물론 K씨는 전혀 그 학급비에 손을 대지 않았다. 너무 졸지에 당한 변이라 K씨는 아무 말도 못한 채 그냥 무방비로 계속되는 담임선생님의 폭력을 고스란히 받았을 뿐이다. 이 엄청난 두려움을 겪은 후 K씨는 자기보다 나이가 많은 남자 앞에만 서면 손발에 땀이 나고 말을 제대로 못하는 증상을 가지게 되었다.

가해자가 누구이든지 심지어 부모라고 할지라도 졸지에 폭행을 당하면 당황하여 몸과 마음이 얼어붙는다. 더군다나 본인의 지각하기에 억울하게 당한 폭력이지만 설명하거나 감정을 표현할 기회조차 갖지 못하며 일방적으로 당한 폭력이라면 그 여파는 오래 지속된다. 피해자는 '존재 자체가 부정되는' 분노와 무기력감을 동시에 느낀다. 설사 일상생활에서는 그 감정을 잊고 지내는 것 같고, 다 이해하고 해결된 것 같은 느낌을 가질 수 있다. 정확히 말하면 잊은 것이 아니라, 잊은 척하며 살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더 이상 고통을 느끼지 않으려는, 우리 자신을 보호하려는 자연스런 반응이다. 하지만 그 예전의 사건을 되살리게 되는 자극을 접하게 되면 예전의 그 감정을 다시 격렬하게 느끼게 된다.

피해자가 받았을 분노 좀더 헤아리길

상담이나 임상 현장에서 많이 회자되는 '내면아이(inner child)'라는 이론에 의하면, 사람의 무의식 속에는 어린 시절의 아픔과 상처로 인한 자아가 있다. 만일 누군가 어린 시절에 성폭력이나 가정폭력 등으로 심각한 상처를 입었다면, 잊은 것 같지만 몇 년, 혹은 몇십 년 뒤에도 그 상처의 기억이 나와서 재발이 계속된다. 즉, 어린 시절의 경험이 미래의 삶에 계속해서 영향을 끼친다. 즉, 비유적으로 말하면, 그 당시 상처받은 '아이'가 우리 마음속(내면)에 그대로 존재하고 있다는 것이다.상처받은 '내면아이'를 치유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먼저 그 내면아이가 자신의 마음속에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만나야 한다. 그리고 그 당시 표현하지 못했던 감정을 충분히 드러내야 한다. 앞의 K씨의 경우, 안전한 집단상담의 분위기 속에서 처음에는 주저하면서 망설였지만 용기를 내어 초등학교 5학년 때로 돌아가 담임교사와의 만남을 시작했다. 특히 그때 하고 싶었지만 표현하지 못했던 감정을 충분히 표현하도록 하였다. 그는 분노와 억울함을 표현하고 담임교사에게 "미안하다"고 말해달라고 요구하였다. 담임교사의 역을 맡은 집단원이 "미안하다"고 사과하자 갑자기 오열하기 시작했다. 얼마간의 시간이 지난 후 오열을 멈춘 그는 "십년 묵은 체증이 내려갔다"며 "후련하다"고 말했다. 그 후에는 최근에 일터에서 경험한 상관과의 만남을 재현하도록 하였다. K씨는 훨씬 편하게 자신의 의견을 조리 있게 개진하기 시작하였다.

내면아이를 치유하기 위해서 안전한 분위기속에서 가해당사자를 만나 화해를 하는 것이 좋다. 안전한 분위기가 중요한 이유는 피해자가 자신의 격할 수 있는 감정을 두려움 없이 표현할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꼭 당사자를 직접 만나야 하는 것은 물론 아니다. 가해자가 이미 사망한 경우도 있지만, 가해당사자는 이런 과정을 함께 할 수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렇기 때문에 상담에서는 대리자를 내세워 작업을 한다. 함께 작업하는 상대가 가해당사자인지 아닌지는 크게 중요하지 않다. 결국 작업은 자신의 마음속에 새겨져 있는 가해당사자와의 관계를 정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스스로 자신의 마음속에서 두려워 떨고 있는 내면아이를 만나 그 아픔을 공감하고 그동안의 어려움을 어루만져 주는 것도 효과가 있다. "그때 네가 얼마나 두렵고 힘들었을지 생각하면 너무 가슴이 아프다. 얼마나 힘들고 외로웠니? 이제는 너를 버려두지 않고 항상 함께 있을 께."

감정은 옳고 그름이 없다. 옳은 감정과 그른 감정이 없다는 것이다. 감정은 감정일 뿐이다. 그리고 감정은 나이에 관계없이 동일하다. 어린이와 어른의 미운 감정이 다르지 않다. 그렇기 때문에 감정은 일견 유치(幼稚)해 보인다. 하지만 우리의 존재는 감정이 충분히 인정받을 때 비로소 잠재력을 꽃피우면 성숙해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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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성열 고려대 교수

필자 한성열 고려대 심리학과 교수는 국내 긍정심리학계의 최고 권위자로 미국 심리학을 중심으로 하는 기존 심리학이 문화의 영향력을 경시하는 것을 비판하고 인간 행동에 미치는 문화의 중요성을 설파하고 있다. 특히 한 교수는 심리학 전공자가 이론보다는 많은 사람들을 만나 소통해야 한다는 생각에서 기업체, 대학, 교회 등을 찾아다니며 몸 건강 못지않게 마음의 건강이 중요함을 역설하고 있다. 저서로는 ‘신명의 심리학’이 있으며 역서로는 ‘성공적 삶의 심리학’ ‘노년기의 의미와 즐거움’ ‘남자 나이 마흔이 된다는 것’ 등이 있다.


한성열 고려대 교수